2018/06/27 22:24

이완용평전을 읽고 2018

 우봉이씨 22대손 이호석의 장남으로 출생한 이완용은 10살때 양부인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자신의 집안은 퇴락하는 양반이었으나 양부인 이호준은 그당시 잘나가는 양반이었다. 양부는 노론 계열로 정치에서 막강한 인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이호준의 처는 여흥민씨 민용현의 딸로 중전인 중전 민씨의 외척인 민치상의 누이였다. 이렇게 잘나가는 사람을 양부로 둔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음으로 양으로 양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그가 출세길에 나서는데 고종과 민비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1882년 10월 임오군란을 피해 장호원으로 피해있던 민씨가 환궁을 하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치뤄진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한 이완용은 당시 나이 25세였다. 백범은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과 부패에 놀라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이완용은 당당히 합격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금수저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고종과 세번째 만남에서 고종은 그가 자신을 보좌할 충신의 마음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를 고속 승진시킨다. 그리고 1886년 신식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1년 후에 주미공사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건너갔다. 거기에서 영어를 습득하고 외국의 문화를 익히게 된다. 2차로 1888년 주미 공사관으로 다시 미국에 간 이완용은 서양의 눈으로 비춰진 조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서양인에 비해서 체격적인 면이나 과학의 발달이나 민주주의를 이룬 모습에서 뛰어난 모습을 볼 수 없게된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조선을 비하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적인 사고를 익히는 계기도 된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조선에 이식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동도서기. 조선의 성리학과 서양의 과학을 매치시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양반이란 신분제와 왕권국가인 조선의 틀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미 서양의 민주주의나 인본주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과 토호들의 폭정으로 인해 조선에 새로운 사회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상을 말해보자면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이 동양으로 몰려와서 수교를 맺자고 하였으나 그 본질은 식민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부적으로는 백성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는 변화의 바람이 들끌었다. 지배계층은 백성들이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일들을 또 저지를까 가슴졸여하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고, 왕인 고종과 민비,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정권을 잡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한마디로 나라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특히 고종은 민비가 시해되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뺏겨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가자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으며, 나라의 발전보다는 왕권 강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그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형세 판단을 잘못하고, 일본은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텐진조약과 포츠머스 조약, 그리고 미국과 가쓰라-태프트조약, 영국과 맺은 영일조약을 통해 조선의 통치권을 인정받게 된다. 
1905년 11월 10일 일제는 조선보호협약의 완성을 위해 이토가 일왕의 친서를 가지고 고종에게 알현을 요구한다. 그 뜻을 파악한 고종은 병을 핑계로 거부를 하다가 15일에 가서야 만남을 갖는다. 그 다음날인 16일, 일본공사 하야시는 조선의 주요대신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 을사조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대신들은 거부의 뜻을 밝히고 나왔으나 그날 밤 고종의 궁궐로 입궐하여 낮에 있었던 하야시와의 조약 체결 문제를 다시한번 의논하게 된다. 여기에서 고종은 이렇게 중요한 일은 자신보다 대신들과 백성들의 뜻을 물어봐야한다는 핑계를 대어 거절한다. 왕조국가에서 그런 핑계를 댄다면 일본인이 수긍을 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 결국 고종은 자신은 뒤로 빠져 있을테니 대신들이 조약을 맺으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뜻을 이완용은 간파한다. 그리고 11월 17일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외무대신 박제순,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가'에 서명하여 반포되었다. 이때 이완용은 이또에게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조선의 힘이 강해지면 이 조약을 파기한다는 단서조항을 넣었다. 그리고 이 조항을 가지고 백성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설득당한 사람음 양반들이었다.
여기에서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여 그의 이름이 만고의 역적이 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지만 결국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신하에게 미뤄버리고 말았다. 본디오빌라도 같다. 예수를 죽여야하는데 후대에 욕먹기 싫으니 유대인에게 책임을 미뤄버리는 그를 보면서 역사에서 이완용만큼 고종 역시 욕을 먹어야하는데 어찌된 것이 아직까지 모든 잘못을 이완용에게만 가고 고종은 그저 심약하고 나약한 왕의 이미지로 남아있으니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완용은 을사조약 후에 완전히 친일로 돌아섰다., 그의 생각에서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이었다. 어짜피 나라는 일제에게 먹히게 되어 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백범처럼 우직하게 나가는 것이 없다. 앞뒤 살펴보고 거기서 최선의 방안을 찾는 것이다. 일진회를 만든 손병준과 같은 친일파와도 다르다. 그는 평민출신이고 자신이 나가서 외치고 설득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동하는데 수완을 발휘했다면 이완용은 뒤에서 곰곰히 생각해보고 앞뒤 재면서 가장 자신에게 유리하고 합리적인 방안이 무엇인가 찾는가가 중요했다. 
그러다가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사건이 터지자 일제는 이참에 조선을 병합하자는 의견이 모아지고 이를 실행한다. 이완용은 여기서도 고민한다. 거기서 일제와 타협한 것은 서명을 하되 폐위된 고종과 순종에게 왕의 호칭을 불리게 해주는 것, 대한 제국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었다. 고종은 그의 제안에 서명을 허락한다. 역시 고종은 나서지 못한다. 그리고 조선은 합병된다. 이에 최익현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왜 서명을 했는가, 당신은 조선의 왕이지 않는가, 서명하기 전에 당신은 죽음으로서 왕의 체모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따졌다. 꽉막힌 사람인줄 알았는데 최익현의 모습에서 보수의 모습을 본다.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를 보고 불쾌해했다.
여하튼 일제에 병탄된 조선에서 조선의 귀족들은 재빨리 친일파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이완용은 백작의 작위를 받는다. 그리고 받은 은사금은 15만원. 일본과 조선의 귀족들과 엮인 화려한 인맥. 1925년 당시 조선의 최고부자는 민영휘였는데 그의 재산이 6천만엔, 2위가 이완용이고 3백만엔 현재가로 600억이었다. 이완용은 이 돈으로 전라도 지역의 땅을 집중 매입한다. 일제가 노리는 것은 쌀이고, 그 쌀이 가장 유명한 것이 호남 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옷도 검소하였고, 일상에서도 사치가 적었다. 음식도 양식을 좋아했으나 회는 먹지도 않았단다. 그의 취미는 문방사우 수집과 글쓰기. 양반이었기에 그에 어울리는 취미활동이었고, 화려하거나 씀씀이가 헤픈 것은 없었다.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죽었다. 일제는 그를 국장으로 치렀는데 당시 조선의 귀족들은 그의 죽음에 믿었던 기둥이 사라져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선 '무슨 낯으로 이길을 떠나가나'란 글을 실었고, 개벽지는 그의 죽음을 조롱했다고 한다.


덧글

  • 바위 2019/07/15 20:09 # 삭제 답글

    참 가증스러운 종자들 미화할걸 미화해야지 전하의 스레기들
  • 2019/08/14 23: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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